평화 120x54x88cm 2007
차가운 돌에 무한한 인간애를 표현한 한진섭 작가
글: 윤진섭(미술평론가, 호남대 교수)
한진섭 작가의 작품에 관해 연구를 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작가의 진면목이 더욱 확연히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 몇 년 뒤에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반대로 한때는 마음을 들뜨게 했던 부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지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미술작품의 경우, 변하지 않는 유형의 사물이다 보니 작품이 변할리는 만무하고, 변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마음이나 취향 일 터이다.
나는 이번에 조각가 한진섭의 작품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다가 비슷한 경우를 체험했다. 그의 작품세계를 필목요연하게 정리한CD자료집을 보면서, 6년 전 그에 관한 글을 쓸 때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쓴 나의 관점이 오늘의 관점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고는 볼 수 없으나, 그의 작품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정신의 에센스를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6년이란 공백기간의 작용이 있었다. 즉, 내가 그에 관한 작가론을 썼던 1993년 이후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이 한결 더 원숙해 있었고, 이번 기회에 초기 작품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보면서 뭐랄까, 한진섭 조각세계의 본질 같은 것을 좀더 명료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 곧 인간애였다.
돌을 사용한 인체조각
그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임했던 197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있게 추구한 소재는 '인간' 이다. 그의 작품은 최근에 손대고 있는 성물(聖物)과 90년대에 들어서 소와 말을 소재로 제작한 동물조각 몇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범주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가족, 소녀, 소년, 여인 등 인간을 화두삼아 지난25년간의 세월을 오직 인체조각에 몰입해 왔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석조이다. 화강석이됐건, 대리석이 됐건, 그는 석조만을 고집해 왔다. 그러니까 브론즈나 철조가 아닌, 돌을 사용한 인체조각이 그의 본령인 셈이다. 이 두 가지가 바로 한진섭의 조각세계를 특징짓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석조에 관해서라면 한국도 그가 굳이 이태리의 피에트라산타에 가지 않았어도 될 만큼 풍부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화강석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우리의 조각적 전통은 매우 뿌리가 깊고 또한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이 불교문화와 민간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석불과 석상, 벅수(돌장승)등은 고유섭 선생의 말처럼 '무기교의 기교', '어른 같은 아이'의 미적 전형을 보이고 있다.
도전과 자극으로 선택한 이태리유학
한진섭이 청운의 뜻을 품고 이태리의 까라라로 유학을 떠났던 1982년 이후 약 10년간은 한국에서 닦은 석조기술에 대리석의 본고장인 에트라산타의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피에트라산타가 어떤 곳인가. 미켈란젤로를 비롯하여 이사무 노구치, 세자르, 포모도르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땀과 영감이 서린 역사적인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이 아닌가. 그는 거기서 살고, 작업을 하며 거장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태리로 갈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외국유학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시 까라라에서 조각수업을 하고 있던 선배 유영교의 도움으로 보다 쉽게 뜻을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태리로 건너가기 전, 70년대 중후반을 한국에서 석조에 몰입했던 한진섭은 석조 기술에 관한 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최승훈에 의하면, 정(釘)으로 돌을 쫄 때의 각도라든지, 망치질의 세기 등 돌을 다듬는 방법에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도 줄곧 대리석이나 화강석을 다뤄왔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돌이 모두 모이는 그곳은 나에게는 더 이상 바랄데가 없는 이상적인 곳이었고 제자리를 찾아온 셈이 되었다." 피에트라산타에는 쟁쟁한 장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몇 십년을 돌과 함께 생활한 노련한 석수장이들이었다. 그 중에는 세계적인 거장 세자르의 작품을 제작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세르지오(돌 작업장에서 작품의 끝마무리를 맡아 해주는 장신:필자주) 씨와 늘친하게 지내면서 많은 조언을 구했고, 그때마다 그는 간단한 충고 한마디로 시원한 해결책을 제공해 줄 때가 많았다. 하루의 작업이 끝난후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몸으로 피에트라산타 광장에 있는바(bar)를 들러 포도주를 한잔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이곳을 찾아온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눌수있는것도 이곳이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리라."
그가 피에트라산타에 거주하던 80년대 초반은 돌작업장에 나가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는 한편, 까라라 국립아카데미에서 조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던 시기였다. 그곳에서 보낸 처음 일년간의 작업은 1982년 로마 아스트로라바아 화랑과 이듬해에 라판테라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이태리로 떠나기 전 국내에서 가진 첫 개인전 이후 약 1년만의 일이었다. 그 이후 몇 년간 그는 가장 바쁘고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까라라 국립아카데미에서 실기를, 피사 국립대학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학하는 한편, 많은 조각 심포지엄에 참가하게 된 일을 매우 감격스럽게 술회하고 있는데, 그 후 몇 년간은 많은 국제조각심포지엄에 참가하면서 기량을 쌓고 외국 작가들과 친교를 맺는 유익한 기간이었다 (까라라 국제조각 심포지엄) 1등상 수상(1983), (파나노 국제조각심포지엄) 특별상 수상(1984), (프랑스 디네 국제조각 심포지엄) 3등상 수상(1985),그리고 1990년의 (로댕 대상전)우수상 수상(일본 하꼬네 야외조각 공원 주최) 등은 그의 이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전통미의 현대적 기법
한진섭의 대략 25년여에 걸친 조각세계의 변천을 살펴볼 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그가 까라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의 전체적인 특징은 '단순과 응축'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1982년에서 80년대 후반까지 제작한 석조작품들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다. 그 이전. 즉 이태리로 건너가기 전에 국내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푸근하고 어수룩한 형태미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태리로 건너가면서 기하학적이며 대칭적인 균제미가 작품 전면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가령,1976년에 제작한「남매」는 밋밋한 얼굴의 형태감에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기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무렵의 작품에는 한국의 전통미가 현대적인 기법으로 녹아 있었다. 즉, 무명의 석수장이에 의해 만들어졌을 돌장승이나 미륵불에서 보이는 것 같은 친근하면서도 소박한 형태미가 정교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부드러운 표면질감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상」을 비롯하여 「여인입상」,「아이상」,「모자상」 등은 이 무렵 한진섭이 빈번하게 차용하던 테마이긴 하지만, 이들은 기하학적이며 대칭적인 구조를 지닌 이태리 거주 시절의 작품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어디에 가나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테마였던 것이다.
이태리 유학시절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이전의 70년대와 그 이후의 90년대를 구분할 때, 70년대와 80년대 한진섭의 작업을 아우르는 기본적인 원리는 대칭이다. 좌우대칭이 됐던, 상하대칭이 됐던 대칭은 이 시기의 작업에서 가장 빈번히 차용되는 조형 원리였다. 그것은 가깝게는 국내의 장승이나 미륵, 혹은 석탑에서 온 것일 수 있겠고, 또 인체의 대칭적인 형태에서 본 딴 것일 수도 있겠으나 80년대 이태리 유학시절의 작품에는 서양의 원시시대 토템이나 아프리카 흑인조각의 영항을 받았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태리 시절의 작품에 공통적인 특징은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가 얼굴의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재이(在伊) 시절의 초기작품인「소년흥상」(1982년 작)을 비롯하여 「여인입상」(1982년 작),「가족상」(1983년 작),「아이들상」(1984년 작) 등의 작품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기하학적이며 대칭적인 구조를 즐기다 보니 자연히 형태는 개방적이기보다는 안으로 응축되는 상태로 굳어지게되는 것이다. 이무렵 한진섭의 작품 전반을 설명할 수 있는 전체적인 윤곽선은 직사각형이다. 작품 하나하나의 외곽선이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와 같은 형태는 부드럽다기 보다는 경직된 인상을 주기가 쉽다. 당시 그가 제작했던 이 직사각형 형태의 조각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의 전 작품들을 통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만큼 이 기간은 서양의 구성주의 내지 입체파, 혹은 토템과 아프리카 흑인조각 등 이국적인 취향 혹은 방법론에 매료되어 실험에 빠져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가 까라라에서 제작한 「엄마와 아기」(1984년 작)에는 구성주의적 방법을 시도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으며, 같은 해에 제작한 「소년좌상」에는 아프리카 흑인조각으로 부터 받은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진섭이 이태리에서 귀국한 뒤, 한국에서 보낸 10년간은 새로운 조각적 비전을 찾아 노력했던 시기였다. 이태리에서 완전히 귀국하여 처음에는 이천, 나중에는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기에 이른 것이다.
끝없는 화두 '인간'
귀국후의 작업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해학과 유머'이다. 우선 소재 자체를 허수아비,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족,소녀 등 친근한 이웃에서 빌려옴으로써 작품에서 고귀한 가치와 신비스러운 요소를 제거했다. 형태감도 이태리 시절의 대칭적인 기하학적 형태에서 도이(渡伊) 이전의 유기적인 형태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같은 유기적인 형태라고는 하되, 이태리에 가기 이전, 곧 70년대의 단순한 유기적 형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방하고 자신감에 찬 형태감 이었다. 예컨대, 1992년 작인 「봄의 소리」는 붉은 화강석으로 제작된 것인데, 이 작품은 천연의 돌 형태를 연상시키리 만치 자연스럽게 외곽선을 살리고 있다. 표면질감도 매끈하게 이루어져 있고 미세한 굴곡이 살아 있어서 자연스럽기 그지없다.1991년에서 중반에 이르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붉은 화강석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해학과 고뇌 등 인간의 감정을 표정에 담아냄으로써 형태미에 치중했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인간 내면의 문제에 골몰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무렵의 작품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훨씬 폭넓어졌음을 발견한 것은 내게 있어서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덧 부드러워지고 순후해져 있었던 것이 다. 무주석 사암으로 제작한 「우리들의 모습」 (1994년 작)은 어리숙한 농부를 모델로 제작안 것인데,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너그러울 수가 없다. 미 무렵의 작품들은 또한 몸통과 두상부분을 철봉으로 연결하여 두상이 돌아가도록 제작돼 있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지도록 한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위에서 대략 살펴본 것처럼 한진섭 조각의 화두는인간이다 이제까지 그래왔건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간을 소재로 내용상의 변화를 꾀해왔다. 양식상으로도 추상과 구상,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와 변신마저도 '인간애'라고 하는 영원한 가치와 결부될 때, 그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조각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자기부정의 정신을 통해 나오는 이 뜨거운 긍정이야말로 조각가로서 그의 뚜렷한 존재방식인 것이다